마이클 콜린스 (우주비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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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이클 콜린스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난 미국의 우주비행사이다. 그는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공군에서 복무했으며, 시험 비행 조종사로도 활동했다. 콜린스는 제미니 10호에 탑승하여 우주 비행을 경험했으며, 아폴로 11호 사령선 파일럿으로 달 궤도를 비행하며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달에 착륙하는 것을 지원했다. NASA를 퇴직한 후 국무부 공공 담당 차관보, 국립 항공우주 박물관 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작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2021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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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콜린스 (우주비행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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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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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이클 콜린스 |
출생일 | 1930년 10월 31일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일 | 2021년 4월 28일 |
사망지 | 미국 플로리다주 네이플스 |
안장 장소 | 알링턴 국립묘지 |
국적 |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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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
교육 | 미국 육군사관학교 (BS) |
개인 정보 | |
배우자 | 퍼트리샤 피네건(1957년 결혼, 2014년 사망) |
자녀 | 3명 (케이트 콜린스 포함) |
친척 | 제임스 로턴 콜린스(아버지), 제임스 로턴 콜린스 2세(형제), J. 로턴 콜린스(삼촌) |
군 복무 정보 | |
소속 | 미국 공군 |
복무 기간 | 1952년–1970년 (현역), 1970년–1982년 (예비역) |
계급 | 미국 공군 소장 |
우주 비행사 정보 | |
소속 기관 | NASA |
선발 그룹 | NASA 그룹 3 (1963년) |
총 비행 시간 | 11일 2시간 4분 |
임무 | 제미니 10호, 아폴로 11호 |
선외 활동 횟수 | 2 |
총 선외 활동 시간 | 1시간 28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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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
국무부 정보 | |
직책 | 제12대 국무부 공보 담당 차관보 |
대통령 | 리처드 닉슨 |
임기 시작 | 1970년 1월 6일 |
임기 종료 | 1971년 4월 11일 |
이전 | 딕슨 도넬리 |
이후 | 캐럴 레이즈 |
2. 어린 시절 및 학력
마이클 콜린스는 1930년 10월 31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57][1]
콜린스는 아버지의 군 복무로 인해 17세까지 로마, 오클라호마, 뉴욕주 거버너스 아일랜드, 메릴랜드주 포트 호일, 오하이오주 포트 헤이즈, 푸에르토리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 등 여러 곳에서 거주했다. 소년 시절 복사로서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복사로 봉사하기도 했다. 푸에르토리코에서 그루먼 위지온을 타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으며, 조종사로부터 비행의 일부를 조종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가족은 워싱턴 D.C.로 이사했고, 콜린스는 세인트 올반스 학교에 다니다가 1948년에 졸업했다.[5] 그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52년 군사 과학 분야 이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콜린스는 미국 공군(USAF)에 입대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항공 분야의 발전 가능성과 더불어, 육군에 입대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족벌주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미국 공군사관학교는 건설 중이었고,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은 공군 위관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다.[6]
마이클 콜린스는 1948년 세인트 올반스 학교를 졸업하고,[5] 1952년에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 과학 분야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6] 그는 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미국 공군(USAF)에 입대했다.[6]
2. 1. 어린 시절
마이클 콜린스는 1930년 10월 31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57][1] 그의 아버지는 제임스 로턴 콜린스로 당시 로마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던 미 육군 장교였고, 어머니는 버지니아 C. 콜린스였다. 콜린스에게는 형 제임스 로턴 콜린스 주니어와 누나 버지니아와 아그네스가 있었다.[2] 콜린스의 어머니는 영국계였고, 아버지의 가족은 아일랜드 출신이었다.[3]콜린스는 아버지의 군 복무로 인해 17세까지 로마, 오클라호마, 뉴욕주 거버너스 아일랜드, 메릴랜드주 포트 호일, 오하이오주 포트 헤이즈, 푸에르토리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 등 여러 곳에서 거주했다. 소년 시절 복사로서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복사로 봉사하기도 했다. 푸에르토리코에서 그루먼 위지온을 타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으며, 조종사로부터 비행의 일부를 조종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가족은 워싱턴 D.C.로 이사했고, 콜린스는 세인트 올반스 학교에 다니다가 1948년에 졸업했다.[5] 그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52년 군사 과학 분야 이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콜린스는 미국 공군(USAF)에 입대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항공 분야의 발전 가능성과 더불어, 육군에 입대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족벌주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미국 공군사관학교는 건설 중이었고,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은 공군 위관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다.[6]
2. 2. 학력
마이클 콜린스는 1948년 세인트 올반스 학교를 졸업하고,[5] 1952년에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 과학 분야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6] 그는 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미국 공군(USAF)에 입대했다.[6]3. 군 복무
이탈리아 로마에서 미국 육군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1952년에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했다. 이 시기 공군은 미국 공군사관학교가 창설기였기 때문에 육군과 해군에서도 인재를 모으고 있었다.[94]
그 후, T-6 텍산을 시작으로 비행 훈련을 거듭하여 F-86 세이버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1960년에는 에드워드 공군 기지에 있는 시험 비행사 학교를 졸업했다.[94]
콜린스는 1952년 8월 미시시피주 콜럼버스의 콜럼버스 공군 기지에서 T-6 텍산으로 기본 비행 훈련을 시작했다. 이후 텍사스주 샌마코스의 샌마코스 공군 기지에서 계기 비행 및 편대 비행을, 텍사스주 와코의 제임스 코널리 공군 기지에서 제트 항공기 훈련을 받았다. 비행은 그에게 쉬웠고, 동료들과 달리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었다. 1953년 9월, 네바다주 넬리스 공군 기지에서 F-86 세이버를 조종하며 고급 주간 전투기 훈련을 받았는데, 22주 동안 사고로 11명이 사망할 정도로 위험했다.
1954년 1월, 캘리포니아주 조지 공군 기지의 제21 전투폭격 비행단에 배치되어 F-86에서 지상 공격 및 핵무기 투하 기술을 배웠다. 같은 해 12월 제21 비행단과 함께 프랑스 샹블레-부시에르 공군 기지로 이동했다. 1956년 사격 훈련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고, 같은 해 북대서양 조약 기구 훈련 중 조종석 뒤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콰르티에 제네랄 다보빌 근처에서 F-86에서 탈출해야 했다.
콜린스는 장교 식당에서 미래의 아내 패트리샤 메리 피네건을 만났다.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출신으로 이매뉴얼 칼리지 영어 전공 졸업 후, 미혼모를 상대하는 사회복지사였고, 더 많은 세상을 보기 위해 공군 서비스 클럽에서 일하고 있었다. 콜린스는 명목상 미국 성공회 신자였고, 피네건은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기에 콜린스는 결혼 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동안 콜린스가 서독으로 재배치되면서 결혼을 연기한 후, 1957년에 결혼했다. 1959년에 딸 케이트 콜린스를, 1961년에는 둘째 딸 앤, 1963년에는 아들 마이클을 낳았다.
1957년 말 미국으로 돌아온 후, 일리노이주 셔누트 공군 기지에서 항공기 정비 장교 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이 학교를 "우울하다"고 묘사했는데, 수업이 지루했고, 비행 시간이 부족했으며, 장비가 구식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이동 훈련 분견대(MTD)를 지휘하며 전 세계의 공군 기지를 방문했고, 넬리스 공군 기지에서 야전 훈련 분견대(FTD 523)의 초대 지휘관이 되었다.
콜린스는 MTD(Maintenance and Technical Data)에 배치되어 1,500시간 이상의 비행 시간을 축적했는데, 이는 캘리포니아 에드워드 공군 기지에 있는 미 공군 실험 비행 시험 조종사 학교 입학에 필요한 최소 요건이었다. 그의 지원은 성공적이었고, 1960년 8월 29일, 그는 나중에 우주비행사가 된 프랭크 보먼, 짐 어윈, 톰 스태퍼드가 포함된 60C반의 일원이 되었다. 군 시험 비행사 교육은 노스 아메리칸 T-28 트로잔으로 시작하여 고성능 F-86 세이버, B-57 캔버라, T-33 슈팅스타, F-104 스타파이터를 거쳤다. 콜린스는 골초였지만, 1962년에 심한 숙취에 시달린 후 담배를 끊었다. 다음 날, 그는 B-52 스트래토포트리스의 부조종석에서 니코틴 금단의 초기 단계를 겪으면서, 인생 최악의 4시간을 보냈다고 묘사했다.
1962년 2월 20일, 존 글렌의 머큐리 아틀라스 6 비행을 보고 콜린스는 NASA 우주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3. 1. 전투기 조종사
콜린스는 1952년 8월 미시시피주 콜럼버스의 콜럼버스 공군 기지에서 T-6 텍산으로 기본 비행 훈련을 시작했다. 이후 텍사스주 샌마코스의 샌마코스 공군 기지에서 계기 비행 및 편대 비행을, 텍사스주 와코의 제임스 코널리 공군 기지에서 제트 항공기 훈련을 받았다. 비행은 그에게 쉬웠고, 동료들과 달리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었다. 1953년 9월, 네바다주 넬리스 공군 기지에서 F-86 세이버를 조종하며 고급 주간 전투기 훈련을 받았는데, 22주 동안 사고로 11명이 사망할 정도로 위험했다.1954년 1월, 캘리포니아주 조지 공군 기지의 제21 전투폭격 비행단에 배치되어 F-86에서 지상 공격 및 핵무기 투하 기술을 배웠다. 같은 해 12월 제21 비행단과 함께 프랑스 샹블레-부시에르 공군 기지로 이동했다. 1956년 사격 훈련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고, 같은 해 북대서양 조약 기구 훈련 중 조종석 뒤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콰르티에 제네랄 다보빌 근처에서 F-86에서 탈출해야 했다.
콜린스는 장교 식당에서 미래의 아내 패트리샤 메리 피네건을 만났다.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출신으로 이매뉴얼 칼리지 영어 전공 졸업 후, 미혼모를 상대하는 사회복지사였고, 더 많은 세상을 보기 위해 공군 서비스 클럽에서 일하고 있었다. 콜린스는 명목상 미국 성공회 신자였고, 피네건은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기에 콜린스는 결혼 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동안 콜린스가 서독으로 재배치되면서 결혼을 연기한 후, 1957년에 결혼했다. 1959년에 딸 케이트 콜린스를, 1961년에는 둘째 딸 앤, 1963년에는 아들 마이클을 낳았다.
1957년 말 미국으로 돌아온 후, 일리노이주 셔누트 공군 기지에서 항공기 정비 장교 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이 학교를 "우울하다"고 묘사했는데, 수업이 지루했고, 비행 시간이 부족했으며, 장비가 구식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이동 훈련 분견대(MTD)를 지휘하며 전 세계의 공군 기지를 방문했고, 넬리스 공군 기지에서 야전 훈련 분견대(FTD 523)의 초대 지휘관이 되었다.
3. 2. 시험 비행 조종사
콜린스는 MTD(Maintenance and Technical Data)에 배치되어 1,500시간 이상의 비행 시간을 축적했는데, 이는 캘리포니아 에드워드 공군 기지에 있는 미 공군 실험 비행 시험 조종사 학교 입학에 필요한 최소 요건이었다. 그의 지원은 성공적이었고, 1960년 8월 29일, 그는 나중에 우주비행사가 된 프랭크 보먼, 짐 어윈, 톰 스태퍼드가 포함된 60C반의 일원이 되었다. 군 시험 비행사 교육은 노스 아메리칸 T-28 트로잔으로 시작하여 고성능 F-86 세이버, B-57 캔버라, T-33 슈팅스타, F-104 스타파이터를 거쳤다. 콜린스는 골초였지만, 1962년에 심한 숙취에 시달린 후 담배를 끊었다. 다음 날, 그는 B-52 스트래토포트리스의 부조종석에서 니코틴 금단의 초기 단계를 겪으면서, 인생 최악의 4시간을 보냈다고 묘사했다.1962년 2월 20일, 존 글렌의 머큐리 아틀라스 6 비행을 보고 콜린스는 NASA 우주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콜린스는 그 해 두 번째 우주비행사 그룹에 지원했다. 공군에서 선발되는 조종사의 수를 늘리기 위해, 공군은 최고의 지원자들을 "매력 학교"에 보냈다. 텍사스주 브룩스 공군 기지에서 신체 검사와 정신 검사를 받았고, 유인 우주선 센터 (MSC)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9월 중순, 그는 합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선발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실망스러웠다. 콜린스는 두 번째 9명이 자신을 포함하여 그 이전의 머큐리 세븐이나 그 이후의 5개 그룹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그 해 미 공군 실험 비행 시험 조종사 학교는 X-15 및 X-20 프로그램을 통해 공군이 우주 연구에 참여하려고 시도하면서 미 공군 항공우주 연구 조종사 학교(ARPS)가 되었다. 콜린스는 우주 비행의 기본에 대한 새로운 대학원 과정을 신청했다. 그는 1962년 10월 22일 세 번째 반에 합격했다. 그의 11명의 반에는 찰스 배셋, 에드워드 기븐스, 조 잉글 등 세 명의 미래 우주비행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수업 외에도, 그들은 F-104 스타파이터를 타고 약 27,432m까지 비행했다. 그들은 아크의 꼭대기를 지나면서 짧은 무중력 상태를 경험했다. 이 과정을 마친 후 1963년 5월에 전투기 운용에 복귀했다.
6월 초, NASA는 다시 우주비행사 지원자를 모집했다. 콜린스는 첫 번째 지원과 동일한 과정을 거쳤지만, 정신 감정은 받지 않았다. 10월 14일, 그는 텍사스주 랜돌프 공군 기지에 있었는데, NASA의 우주비행사 사무국장인 데케 슬레이턴이 전화를 걸어 우주비행사가 되는 데 여전히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찰스 배셋도 합격했다. 당시 콜린스는 3,000시간 이상을 비행했고, 그 중 2,700시간은 제트기였다.
4. 우주 프로그램
콜린스를 포함한 세 번째 14명의 우주비행사는 이전 두 그룹의 우주비행사들에 비해 평균 나이가 어리고, 학력은 더 높았지만, 비행 시간은 더 적었다. 14명 중 8명만이 시험 비행 조종사였으며, 콜린스와 윌리엄 앤더스만이 미국 외에서 태어났다. 콜린스는 형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집안의 장남이거나 외아들이었다.
훈련은 우주 비행의 기본에 대한 240시간 과정으로 시작되었고, 이 중 58시간은 지질학에 할애되었는데 콜린스는 이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고,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훈련 마지막에 우주비행사 사무국장 앨런 셰퍼드는 14명에게 함께 우주 비행을 하고 싶은 동료 우주비행사의 순위를 매기라고 요청했고, 콜린스는 데이비드 스콧을 1순위로 꼽았다.
1962년 존 글렌의 우주 비행에 영향을 받아 우주 비행사를 지원하여 선발되었다.
제미니 계획에 참가하여 제미니 7호에서는 예비 탑승원으로 선정되었다. 1966년 7월에는 제미니 10호에 파일럿으로 탑승하여 첫 우주 비행을 경험했다.
제미니 7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제미니 임무보다 많은 15개의 과학 실험이 제미니 10호에 수행되었다. 제미니 9호의 선외 활동(EVA)에 문제가 발생한 후, 나머지 제미니 목표는 마지막 세 번의 비행에서 완료해야 했다. 전체 목표 수는 증가했지만, 콜린스의 선외 활동의 난이도는 상당히 축소되었다. 제미니 8호에서 있었던 배낭이나 우주 비행사 기동 장치(AMU)는 없었다.
그들의 3일간의 임무는 두 대의 아제나 표적 비행체와 랑데부하고, 두 번의 선외 활동을 수행하고, 15가지의 다른 실험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훈련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승무원은 궤도 랑데부, 아제나 제어, 그리고 콜린스의 선외 활동의 복잡한 과정을 배웠다. 네 번째 선외 활동을 위해 수중 훈련은 거의 수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주로 콜린스에게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추진에 사용할 질소총을 훈련하기 위해 권투 링 크기의 매끄러운 금속 표면이 설치되었다. 그는 표면에서 떨어져 올라가게 하는 가스 제트가 있는 원형 패드에 서 있었다. 질소총을 사용하여 그는 "미끄러운 테이블"을 가로질러 자신을 추진하는 연습을 했다.
제미니 10호는 1966년 7월 18일 현지 시간 17:20에 케이프 커내버럴의 발사 단지 19에서 발사되었다. 궤도에 진입한 후, 100분 전에 발사된 아제나 표적 비행체보다 약 1600 km 뒤에 있었다. 랑데부는 제미니 10호의 네 번째 궤도인 10:43에 달성되었고, 11:13에 도킹이 이어졌다. 임무 계획은 아제나 표적과의 여러 번의 도킹을 요구했지만, 육분의를 사용하는 콜린스의 실수로 귀중한 추진제가 소모되어, 임무 통제소는 추진제를 절약하기 위해 이 목표를 취소했다. 도킹이 완료되자 아제나 10 추진 시스템이 활성화되어 우주 비행사들을 지구 상공 764 km의 새로운 고도 기록으로 끌어올렸고, 보스호트 2호가 세운 이전 기록을 깼다.
1966년 7월 19일 03:58에 아제나 10 엔진의 두 번째 연소는 3월 16일에 제미니 8호 임무를 위해 발사된 아제나 8과 동일한 궤도에 진입시켰다. 그의 첫 번째 선외 활동에서 콜린스는 제미니 캡슐을 떠나지 않고, 자외선 카메라를 들고 해치를 통해 일어섰다. 콜린스는 자외선 사진을 찍은 후, 그들이 가져온 판의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우주에서 찍은 사진과 실험실에서 찍은 사진을 비교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 마치 전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로마 신화의 신과 같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선외 활동은 콜린스가 은하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지구의 어두운 면에서 시작되었다. 콜린스와 영의 눈에서 눈물이 나기 시작하여 선외 활동을 조기에 종료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객실에서 내쉰 이산화 탄소를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수산화 리튬이 실수로 우주 비행사의 우주복에 공급되었다. 문제를 일으킨 압축기는 꺼졌고, 높은 산소 흐름이 환경 제어 시스템을 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콜린스의 두 번째 선외 활동 전에 아제나 10 우주선이 폐기되었다. 영은 콜린스가 49 ft의 탯줄에 연결된 상태에서 아제나 8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캡슐을 가까이 배치했다. 콜린스는 동일한 임무에서 두 번의 우주 유영을 수행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작업을 완료하는 데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체르난도 제미니 9호에서의 우주 유영 동안 경험한 것이다. 그는 우주선 외부에 있는 미세 유성체 실험을 제거하고, 질소 기동 추진기를 구성했다. 콜린스는 우주선에 재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영이 탯줄로 그를 다시 끌어당겨야 했다.
두 사람은 43번째 궤도에서 감속 로켓을 활성화했고, 1966년 7월 21일 16:06에 대서양에 착수했으며, 구조선인 수송 상륙함 에서 3.5 nmi 떨어진 곳에 착수했고, 헬리콥터로 구조되었다. 콜린스와 영은 비행의 주요 목표를 거의 모두 완수했다. 도킹 연습과 랜드마크 측정 실험은 추진제를 절약하기 위해 취소되었고, 미세 유성체 수집기는 우주선에서 벗어나 떠내려가면서 손실되었다.
1969년,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를 달 표면에 도달시킨 아폴로 11호에서는 사령선 파일럿을 맡았다. 콜린스는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착륙선으로 달 표면에 하강하는 동안, 달 궤도상에서 아폴로 사령선을 조종하고, 달 표면 사진 촬영 등을 수행했다. 따라서 콜린스 본인은 달 표면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잊혀진 우주 비행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94]。
사령선 조종사(CMP)로서 콜린스의 훈련은 달 착륙선(LM)과 달에서의 우주 유영(EVA) 훈련과는 완전히 달랐으며, 때로는 암스트롱이나 올드린 없이 진행되기도 했다. 시뮬레이터 외에도, 재진입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한 원심 분리기 훈련과 NASA 랭글리 연구 센터, 햄프턴, 버지니아에서 거대한 장치로 도킹 연습을 포함한 우주복의 측정이 있었다. 콜린스는 LM과의 만남의 적극적인 참여자였기 때문에, LM이 착륙하지 않거나 너무 일찍 또는 너무 늦게 발사되는 경우를 포함한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한 18가지 만남 계획을 담은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은 117페이지에 달했다.
아폴로 11호의 임무 패치는 콜린스가 만들었다. 예비 사령관인 짐 러벨은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언급했다. 콜린스는 그 아이디어를 좋아했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의 책, ''북아메리카의 물새, 먹이새, 사냥새''에서 예술가 월터 A. 웨버의 그림을 찾아 그렸고, 그 아래에 달 표면과 배경에 지구를 추가했다.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시뮬레이터의 컴퓨터 전문가에게서 나왔다. CSM(사령선)의 호출 부호 ''컬럼비아''는 NASA 공공 업무 담당 부국장 줄리안 쉬어가 만들었다. 그는 대화 중에 콜린스에게 그 아이디어를 언급했고, 콜린스는 더 나은 것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아폴로 11호 훈련 동안 슬레이턴은 콜린스에게 비행 후 승무원 배치를 다시 받을 것을 제안했다. 콜린스는 아폴로 14호의 예비 사령관이 되고, 그 다음에는 아폴로 17호의 사령관이 될 가능성이 컸지만, 그는 아폴로 11호가 성공하면 다시 우주로 가고 싶지 않다고 슬레이턴에게 말했다. 우주비행사의 어려운 일정은 그의 가족 생활을 힘들게 했다. 그는 존 F. 케네디의 10년 안에 달에 착륙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하고 싶었고, 그 목표가 달성되면 달을 더 탐사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 임무는 세르난에게 주어졌다.
약 100만 명의 관중이 발사 현장 근처의 고속도로와 해변에서 아폴로 11호의 발사를 지켜봤다. 발사는 33개국에서 생중계되었으며, 미국에서만 약 2,500만 명의 시청자가 있었다. 수백만 명이 라디오 방송을 청취했다. 거대한 새턴 V 로켓에 의해 추진된 아폴로 11호는 1969년 7월 16일 케네디 우주 센터의 발사 복합체 39A에서 13:32 UTC (09:32 EDT)에 발사되었으며, 12분 후에 지구 궤도에 진입했다. 한 바퀴 반을 돈 후, S-IVB 3단계 엔진이 우주선을 달을 향한 궤도로 밀어냈다. 약 30분 후, 콜린스는 전치, 도킹 및 분리 기동을 수행했다. 이 기동에는 ''컬럼비아''를 사용한 S-IVB 단 분리, 회전, 달 착륙선 ''이글''과의 도킹이 포함되었다. 추출된 후, 결합된 우주선은 달로 향했고, 로켓 단계는 그 너머로 궤도를 따라 날아갔다.
1969년 7월 19일 17:21:50 UTC에 아폴로 11호는 달 뒤편으로 지나가면서 달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 서비스 추진 엔진을 점화했다. 그 후 30번의 궤도에서, 승무원들은 분화구 사빈 D에서 남서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고요의 바다의 착륙 지점을 지나치는 것을 보았다. 1969년 7월 20일 12:52:00 UTC에 올드린과 암스트롱은 ''이글''에 들어가 달 착륙을 위한 최종 준비를 시작했다. 17:44:00에 ''이글''은 ''컬럼비아''에서 분리되었다. ''컬럼비아''에 혼자 탑승한 콜린스는 ''이글''이 표면으로 향하기 전에 손상되지 않았고 착륙 장치가 제대로 배치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 앞에서 회전하는 것을 검사했다.
달 주위를 홀로 비행하는 동안 콜린스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아담 이후 어떤 인간도 그런 고독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 있지만, 콜린스는 임무의 일부라는 것을 매우 실감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모험은 세 명의 남자를 위해 구성되었으며, 나는 나의 세 번째를 다른 두 명만큼이나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썼다. ''컬럼비아''가 달의 뒷면을 지나면서 지구와 무선 통신이 끊겼던 각 궤도의 48분 동안, 그가 보고한 느낌은 두려움이나 외로움이 아니라 "인식, 기대, 만족, 자신감, 거의 환희"였다.
콜린스의 첫 번째 임무 중 하나는 지상에 있는 달 착륙선을 식별하는 것이었다. 콜린스가 어디를 찾아야 할지 알려주기 위해, 미션 컨트롤은 달 착륙선이 목표 지점에서 약 4마일 벗어난 곳에 착륙했다고 믿는다고 무선으로 알려주었다. 그는 의심되는 착륙 지점을 지날 때마다 헛되이 달 착륙선을 찾으려고 했다. 달의 뒷면에서 첫 두 궤도에서 콜린스는 연료 전지에서 생성된 과도한 물을 버리고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돌아올 수 있도록 객실을 준비하는 등 유지 보수 작업을 수행했다. ''컬럼비아''는 달을 30번 공전했다.
세 번째 궤도에서 뒷면에 도달하기 직전에 미션 컨트롤은 콜린스에게 냉각수 온도에 문제가 있다고 알렸다. 너무 차가워지면 ''컬럼비아''의 일부가 얼어붙을 수 있었다. 미션 컨트롤은 그에게 수동 제어를 맡고 환경 제어 시스템 오작동 절차 17을 구현하라고 조언했다. 대신 콜린스는 문제가 있는 시스템의 스위치를 자동에서 수동으로, 다시 자동으로 전환하고 온도를 주시하면서 정상적인 가사 작업을 계속했다. ''컬럼비아''가 다시 달의 앞면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고할 수 있었다. 그 후 몇 궤도 동안 그는 달의 뒷면에서 보낸 시간을 "편안하다"고 묘사했다. 올드린과 암스트롱이 EVA를 완료한 후 콜린스는 만남을 위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잠을 잤다. 비행 계획은 ''이글''이 ''컬럼비아''와 만나도록 되어 있었지만, 콜린스는 ''컬럼비아''를 조종하여 ''이글''을 만나러 내려가는 특정 비상 사태에 대비했다. CSM과 많은 시간을 보낸 후, 그는 그것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느껴, 달에서 돌아온 후 이틀 밤 동안 CM의 하부 장비 베이로 가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우주선 107 – 별칭 아폴로 11 – 별칭 ''컬럼비아''. 최고의 우주선. 신이여 축복하소서. 마이클 콜린스, CMP"
2009년 7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콜린스는 암스트롱과 올드린의 안전에 대해 매우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들이 달에서 사망할 경우, 그가 혼자 지구로 돌아가야 하고, 임무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평생 낙인찍힌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라는 점도 우려했다.
1969년 7월 21일 17:54 UTC에 ''이글''은 달에서 이륙하여 달 궤도에 있는 ''컬럼비아''의 콜린스와 다시 합류했다. ''컬럼비아''와 만난 후, 상승 단계는 달 궤도로 버려졌고, ''컬럼비아''는 지구로 돌아가는 길을 만들었다.
''컬럼비아''는 1969년 7월 24일 16:50 UTC (현지 시간 05:50)에 웨이크 섬 동쪽 2,660km 떨어진 태평양에 착수했다. 총 임무 기간은 8일, 3시간, 18분, 35초였다. 잠수부들은 우주비행사들에게 생물학적 격리복(BIG)을 전달했고, 그들이 구명정에 들어가도록 도왔다. 달 표면에서 병원체를 가져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가능성으로 간주되었다. 우주비행사들은 회수 헬리콥터에 윈치로 끌어올려져 항공모함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21일간의 격리 기간(우주 체류 시간도 계산)의 지구 기반 부분의 첫 부분을 보낸 다음 휴스턴으로 이동했다.
1969년 8월 13일, 세 명의 우주비행사는 뉴욕과 시카고에서 그들을 기리는 퍼레이드에 참여했으며, 약 600만 명이 참석했다. 같은 날 저녁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국회의원, 44명의 주지사, 미국 대법원장, 83개국의 대사들이 참석한 공식 국빈 만찬이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서 열렸다. 1969년 9월, 우주비행사들은 22개국을 방문하고 세계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포함하는 38일간의 세계 투어를 시작했다.
4. 1. NASA 우주비행사 선발
콜린스를 포함한 세 번째 14명의 우주비행사는 이전 두 그룹의 우주비행사들에 비해 평균 나이가 어리고, 학력은 더 높았지만, 비행 시간은 더 적었다. 14명 중 8명만이 시험 비행 조종사였으며, 콜린스와 윌리엄 앤더스만이 미국 외에서 태어났다. 콜린스는 형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집안의 장남이거나 외아들이었다.훈련은 우주 비행의 기본에 대한 240시간 과정으로 시작되었고, 이 중 58시간은 지질학에 할애되었는데 콜린스는 이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고,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훈련 마지막에 우주비행사 사무국장 앨런 셰퍼드는 14명에게 함께 우주 비행을 하고 싶은 동료 우주비행사의 순위를 매기라고 요청했고, 콜린스는 데이비드 스콧을 1순위로 꼽았다.
1962년 존 글렌의 우주 비행에 영향을 받아 우주 비행사를 지원하여 선발되었다.[94]
4. 2. 제미니 계획
기본 훈련 후, 콜린스는 자신이 가장 원했던 우주복과 우주 유영(EVA)을 전문 분야로 선택했다. 그는 우주 비행사 사무실과 계약업체 간의 연락 담당 역할을 맡았다. 제미니 4호에서 에드 화이트의 EVA 계획이 비밀리에 진행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기도 했다.1965년 6월 말, 콜린스는 제미니 7호의 예비 조종사로 첫 승무원 임무를 받았다. 슬레이튼의 승무원 교대 시스템에 따라, 제미니 7호 예비 승무원을 거쳐 제미니 10호의 조종사로 투입될 기회를 얻었다.
1966년 1월 24일 제미니 7호 임무 완료 후, 콜린스는 제미니 10호 주 승무원으로 배정되었고, 존 영이 임무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1966년 NASA T-38 추락 사고로 제미니 9호 승무원 찰스 바셋과 엘리엇 시가 사망하면서, 앨런 빈과 C.C. 윌리엄스가 제미니 10호 예비 승무원으로 투입되었다.
제미니 10호 훈련은 3월에 중단되었는데, 슬레이튼이 영, 콜린스, 윌리엄스를 새로운 우주 비행사 그룹 선발 패널에 참여시켰기 때문이다. 패널은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지원자 수를 줄이고, 면접을 통해 19명을 선발했다.
제미니 7호를 제외한 다른 제미니 임무보다 많은 15개의 과학 실험이 제미니 10호에 수행되었다. 제미니 9호의 선외 활동(EVA)에 문제가 발생한 후, 나머지 제미니 목표는 마지막 세 번의 비행에서 완료해야 했다. 콜린스의 선외 활동 난이도는 상당히 축소되었다.
3일간의 임무는 두 대의 아제나 표적 비행체와 랑데부, 두 번의 선외 활동, 15가지 실험 수행이었다. 훈련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승무원은 궤도 랑데부, 아제나 제어, 콜린스의 선외 활동 과정을 배웠다. 수중 훈련은 거의 수행되지 않았다.
제미니 10호는 1966년 7월 18일 현지 시간 17:20에 케이프 커내버럴의 발사 단지 19에서 발사되었다. 궤도에 진입한 후, 100분 전에 발사된 아제나 표적 비행체보다 약 1600 km 뒤에 있었다. 랑데부는 제미니 10호의 네 번째 궤도인 10:43에 달성되었고, 11:13에 도킹이 이어졌다.[9] 육분의를 사용하는 콜린스의 실수로 추진제가 소모되어, 임무 통제소는 추진제를 절약하기 위해 도킹 연습 목표를 취소했다. 도킹 후 아제나 10 추진 시스템이 활성화되어 우주 비행사들을 지구 상공 764 km의 새로운 고도 기록으로 끌어올렸다.
1966년 7월 19일 03:58에 아제나 10 엔진의 두 번째 연소는 3월 16일에 제미니 8호 임무를 위해 발사된 아제나 8과 동일한 궤도에 진입시켰다. 첫 번째 선외 활동에서 콜린스는 제미니 캡슐을 떠나지 않고, 자외선 카메라를 들고 해치를 통해 일어섰다.[9] 자외선 사진을 찍은 후, 가져온 판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그 순간 마치 전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로마 신화의 신과 같다고 느꼈다.
선외 활동은 콜린스가 은하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지구의 어두운 면에서 시작되었다. 콜린스와 영의 눈에서 눈물이 나기 시작하여 선외 활동을 조기에 종료해야 했다. 수산화 리튬이 실수로 우주복에 공급되었다. 문제를 일으킨 압축기는 꺼졌고, 높은 산소 흐름이 환경 제어 시스템을 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9]
콜린스의 두 번째 선외 활동 전에 아제나 10 우주선이 폐기되었다. 영은 콜린스가 49 ft의 탯줄에 연결된 상태에서 아제나 8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캡슐을 가까이 배치했다. 콜린스는 동일 임무에서 두 번의 우주 유영을 수행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작업을 완료하는 데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우주선 외부에 있는 미세 유성체 실험을 제거하고, 질소 기동 추진기를 구성했다. 콜린스는 우주선에 재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영이 탯줄로 그를 다시 끌어당겨야 했다.
두 사람은 43번째 궤도에서 감속 로켓을 활성화했고, 1966년 7월 21일 16:06에 대서양에 착수했으며, 구조선인 수송 상륙함 에서 3.5 nmi 떨어진 곳에 착수했고, 헬리콥터로 구조되었다. 콜린스와 영은 비행의 주요 목표를 거의 모두 완수했다.[10] 도킹 연습과 랜드마크 측정 실험은 취소되었고, 미세 유성체 수집기는 우주선에서 벗어나 떠내려가면서 손실되었다.[9]
4. 2. 1. 제미니 10호
제미니 7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제미니 임무보다 많은 15개의 과학 실험이 제미니 10호에 수행되었다. 제미니 9호의 선외 활동(EVA)에 문제가 발생한 후, 나머지 제미니 목표는 마지막 세 번의 비행에서 완료해야 했다. 전체 목표 수는 증가했지만, 콜린스의 선외 활동의 난이도는 상당히 축소되었다. 제미니 8호에서 있었던 배낭이나 우주 비행사 기동 장치(AMU)는 없었다.
그들의 3일간의 임무는 두 대의 아제나 표적 비행체와 랑데부하고, 두 번의 선외 활동을 수행하고, 15가지의 다른 실험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훈련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승무원은 궤도 랑데부, 아제나 제어, 그리고 콜린스의 선외 활동의 복잡한 과정을 배웠다. 네 번째 선외 활동을 위해 수중 훈련은 거의 수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주로 콜린스에게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추진에 사용할 질소총을 훈련하기 위해 권투 링 크기의 매끄러운 금속 표면이 설치되었다. 그는 표면에서 떨어져 올라가게 하는 가스 제트가 있는 원형 패드에 서 있었다. 질소총을 사용하여 그는 "미끄러운 테이블"을 가로질러 자신을 추진하는 연습을 했다.
제미니 10호는 1966년 7월 18일 현지 시간 17:20에 케이프 커내버럴의 발사 단지 19에서 발사되었다. 궤도에 진입한 후, 100분 전에 발사된 아제나 표적 비행체보다 약 1600 km 뒤에 있었다. 랑데부는 제미니 10호의 네 번째 궤도인 10:43에 달성되었고, 11:13에 도킹이 이어졌다.[9] 임무 계획은 아제나 표적과의 여러 번의 도킹을 요구했지만, 육분의를 사용하는 콜린스의 실수로 귀중한 추진제가 소모되어, 임무 통제소는 추진제를 절약하기 위해 이 목표를 취소했다. 도킹이 완료되자 아제나 10 추진 시스템이 활성화되어 우주 비행사들을 지구 상공 764 km의 새로운 고도 기록으로 끌어올렸고, 보스호트 2호가 세운 이전 기록을 깼다.
1966년 7월 19일 03:58에 아제나 10 엔진의 두 번째 연소는 3월 16일에 제미니 8호 임무를 위해 발사된 아제나 8과 동일한 궤도에 진입시켰다. 그의 첫 번째 선외 활동에서 콜린스는 제미니 캡슐을 떠나지 않고, 자외선 카메라를 들고 해치를 통해 일어섰다.[9] 콜린스는 자외선 사진을 찍은 후, 그들이 가져온 판의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우주에서 찍은 사진과 실험실에서 찍은 사진을 비교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의 자서전에서 그는 그 순간 마치 전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로마 신화의 신과 같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선외 활동은 콜린스가 은하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지구의 어두운 면에서 시작되었다. 콜린스와 영의 눈에서 눈물이 나기 시작하여 선외 활동을 조기에 종료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객실에서 내쉰 이산화 탄소를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수산화 리튬이 실수로 우주 비행사의 우주복에 공급되었다. 문제를 일으킨 압축기는 꺼졌고, 높은 산소 흐름이 환경 제어 시스템을 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9]
콜린스의 두 번째 선외 활동 전에 아제나 10 우주선이 폐기되었다. 영은 콜린스가 49 ft의 탯줄에 연결된 상태에서 아제나 8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캡슐을 가까이 배치했다. 콜린스는 동일한 임무에서 두 번의 우주 유영을 수행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작업을 완료하는 데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체르난도 제미니 9호에서의 우주 유영 동안 경험한 것이다. 그는 우주선 외부에 있는 미세 유성체 실험을 제거하고, 질소 기동 추진기를 구성했다. 콜린스는 우주선에 재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영이 탯줄로 그를 다시 끌어당겨야 했다.
두 사람은 43번째 궤도에서 감속 로켓을 활성화했고, 1966년 7월 21일 16:06에 대서양에 착수했으며, 구조선인 수송 상륙함 에서 3.5 nmi 떨어진 곳에 착수했고, 헬리콥터로 구조되었다. 콜린스와 영은 비행의 주요 목표를 거의 모두 완수했다.[10] 도킹 연습과 랜드마크 측정 실험은 추진제를 절약하기 위해 취소되었고, 미세 유성체 수집기는 우주선에서 벗어나 떠내려가면서 손실되었다.[9]
4. 3. 아폴로 계획
사령선 조종사(CMP)로서 콜린스의 훈련은 달 착륙선(LM)과 달에서의 우주 유영(EVA) 훈련과는 완전히 달랐으며, 때로는 암스트롱이나 올드린 없이 진행되기도 했다. 시뮬레이터 외에도, 재진입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한 원심 분리기 훈련과 NASA 랭글리 연구 센터, 햄프턴, 버지니아에서 거대한 장치로 도킹 연습을 포함한 우주복의 측정이 있었다. 콜린스는 LM과의 만남의 적극적인 참여자였기 때문에, LM이 착륙하지 않거나 너무 일찍 또는 너무 늦게 발사되는 경우를 포함한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한 18가지 만남 계획을 담은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은 117페이지에 달했다.
아폴로 11호의 임무 패치는 콜린스가 만들었다. 예비 사령관인 짐 러벨은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언급했다. 콜린스는 그 아이디어를 좋아했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의 책, ''북아메리카의 물새, 먹이새, 사냥새''에서 예술가 월터 A. 웨버의 그림을 찾아 그렸고, 그 아래에 달 표면과 배경에 지구를 추가했다.[14]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시뮬레이터의 컴퓨터 전문가에게서 나왔다. CSM(사령선)의 호출 부호 ''컬럼비아''는 NASA 공공 업무 담당 부국장 줄리안 쉬어가 만들었다. 그는 대화 중에 콜린스에게 그 아이디어를 언급했고, 콜린스는 더 나은 것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아폴로 11호 훈련 동안 슬레이턴은 콜린스에게 비행 후 승무원 배치를 다시 받을 것을 제안했다. 콜린스는 아폴로 14호의 예비 사령관이 되고, 그 다음에는 아폴로 17호의 사령관이 될 가능성이 컸지만, 그는 아폴로 11호가 성공하면 다시 우주로 가고 싶지 않다고 슬레이턴에게 말했다. 우주비행사의 어려운 일정은 그의 가족 생활을 힘들게 했다. 그는 존 F. 케네디의 10년 안에 달에 착륙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하고 싶었고, 그 목표가 달성되면 달을 더 탐사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 임무는 세르난에게 주어졌다.
약 100만 명의 관중이 발사 현장 근처의 고속도로와 해변에서 아폴로 11호의 발사를 지켜봤다. 발사는 33개국에서 생중계되었으며, 미국에서만 약 2,500만 명의 시청자가 있었다. 수백만 명이 라디오 방송을 청취했다. 거대한 새턴 V 로켓에 의해 추진된 아폴로 11호는 1969년 7월 16일 케네디 우주 센터의 발사 복합체 39A에서 13:32 UTC (09:32 EDT)에 발사되었으며,[15] 12분 후에 지구 궤도에 진입했다. 한 바퀴 반을 돈 후, S-IVB 3단계 엔진이 우주선을 달을 향한 궤도로 밀어냈다. 약 30분 후, 콜린스는 전치, 도킹 및 분리 기동을 수행했다. 이 기동에는 ''컬럼비아''를 사용한 S-IVB 단 분리, 회전, 달 착륙선 ''이글''과의 도킹이 포함되었다. 추출된 후, 결합된 우주선은 달로 향했고, 로켓 단계는 그 너머로 궤도를 따라 날아갔다.
1969년 7월 19일 17:21:50 UTC에 아폴로 11호는 달 뒤편으로 지나가면서 달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 서비스 추진 엔진을 점화했다. 그 후 30번의 궤도에서,[16] 승무원들은 분화구 사빈 D에서 남서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고요의 바다의 착륙 지점을 지나치는 것을 보았다.[17] 1969년 7월 20일 12:52:00 UTC에 올드린과 암스트롱은 ''이글''에 들어가 달 착륙을 위한 최종 준비를 시작했다. 17:44:00에 ''이글''은 ''컬럼비아''에서 분리되었다. ''컬럼비아''에 혼자 탑승한 콜린스는 ''이글''이 표면으로 향하기 전에 손상되지 않았고 착륙 장치가 제대로 배치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 앞에서 회전하는 것을 검사했다.
달 주위를 홀로 비행하는 동안 콜린스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아담 이후 어떤 인간도 그런 고독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 있지만,[18] 콜린스는 임무의 일부라는 것을 매우 실감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모험은 세 명의 남자를 위해 구성되었으며, 나는 나의 세 번째를 다른 두 명만큼이나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썼다. ''컬럼비아''가 달의 뒷면을 지나면서 지구와 무선 통신이 끊겼던 각 궤도의 48분 동안, 그가 보고한 느낌은 두려움이나 외로움이 아니라 "인식, 기대, 만족, 자신감, 거의 환희"였다.
콜린스의 첫 번째 임무 중 하나는 지상에 있는 달 착륙선을 식별하는 것이었다. 콜린스가 어디를 찾아야 할지 알려주기 위해, 미션 컨트롤은 달 착륙선이 목표 지점에서 약 4마일 벗어난 곳에 착륙했다고 믿는다고 무선으로 알려주었다. 그는 의심되는 착륙 지점을 지날 때마다 헛되이 달 착륙선을 찾으려고 했다. 달의 뒷면에서 첫 두 궤도에서 콜린스는 연료 전지에서 생성된 과도한 물을 버리고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돌아올 수 있도록 객실을 준비하는 등 유지 보수 작업을 수행했다. ''컬럼비아''는 달을 30번 공전했다.
세 번째 궤도에서 뒷면에 도달하기 직전에 미션 컨트롤은 콜린스에게 냉각수 온도에 문제가 있다고 알렸다. 너무 차가워지면 ''컬럼비아''의 일부가 얼어붙을 수 있었다. 미션 컨트롤은 그에게 수동 제어를 맡고 환경 제어 시스템 오작동 절차 17을 구현하라고 조언했다. 대신 콜린스는 문제가 있는 시스템의 스위치를 자동에서 수동으로, 다시 자동으로 전환하고 온도를 주시하면서 정상적인 가사 작업을 계속했다. ''컬럼비아''가 다시 달의 앞면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고할 수 있었다. 그 후 몇 궤도 동안 그는 달의 뒷면에서 보낸 시간을 "편안하다"고 묘사했다. 올드린과 암스트롱이 EVA를 완료한 후 콜린스는 만남을 위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잠을 잤다. 비행 계획은 ''이글''이 ''컬럼비아''와 만나도록 되어 있었지만, 콜린스는 ''컬럼비아''를 조종하여 ''이글''을 만나러 내려가는 특정 비상 사태에 대비했다. CSM과 많은 시간을 보낸 후, 그는 그것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느껴, 달에서 돌아온 후 이틀 밤 동안 CM의 하부 장비 베이로 가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우주선 107 – 별칭 아폴로 11 – 별칭 ''컬럼비아''. 최고의 우주선. 신이여 축복하소서. 마이클 콜린스, CMP"[19]
1969년 7월 21일 17:54 UTC에 ''이글''은 달에서 이륙하여 달 궤도에 있는 ''컬럼비아''의 콜린스와 다시 합류했다. ''컬럼비아''와 만난 후, 상승 단계는 달 궤도로 버려졌고, ''컬럼비아''는 지구로 돌아가는 길을 만들었다.[21]
''컬럼비아''는 1969년 7월 24일 16:50 UTC (현지 시간 05:50)에 웨이크 섬 동쪽 2,660km 떨어진 태평양에 착수했다.[22] 총 임무 기간은 8일, 3시간, 18분, 35초였다. 잠수부들은 우주비행사들에게 생물학적 격리복(BIG)을 전달했고, 그들이 구명정에 들어가도록 도왔다. 달 표면에서 병원체를 가져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가능성으로 간주되었다. 우주비행사들은 회수 헬리콥터에 윈치로 끌어올려져 항공모함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21일간의 격리 기간(우주 체류 시간도 계산)의 지구 기반 부분의 첫 부분을 보낸 다음 휴스턴으로 이동했다.
1969년 8월 13일, 세 명의 우주비행사는 뉴욕과 시카고에서 그들을 기리는 퍼레이드에 참여했으며, 약 600만 명이 참석했다.[23][24] 같은 날 저녁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국회의원, 44명의 주지사, 미국 대법원장, 83개국의 대사들이 참석한 공식 국빈 만찬이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서 열렸다.[23][25] 1969년 9월, 우주비행사들은 22개국을 방문하고 세계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포함하는 38일간의 세계 투어를 시작했다.[26][27]
1969년,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를 달 표면에 도달시킨 아폴로 11호에서는 사령선 파일럿을 맡았다. 콜린스는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착륙선으로 달 표면에 하강하는 동안, 달 궤도상에서 아폴로 사령선을 조종하고, 달 표면 사진 촬영 등을 수행했다. 따라서 콜린스 본인은 달 표면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잊혀진 우주 비행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94]。
2009년 7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콜린스는 암스트롱과 올드린의 안전에 대해 매우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들이 달에서 사망할 경우, 그가 혼자 지구로 돌아가야 하고, 임무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평생 낙인찍힌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라는 점도 우려했다.[20]
4. 3. 1. 아폴로 11호
사령선 조종사(CMP)로서 콜린스의 훈련은 달 착륙선(LM)과 달에서의 우주 유영(EVA) 훈련과는 완전히 달랐으며, 때로는 암스트롱이나 올드린 없이 진행되기도 했다. 시뮬레이터 외에도, 재진입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한 원심 분리기 훈련과 NASA 랭글리 연구 센터, 햄프턴, 버지니아에서 거대한 장치로 도킹 연습을 포함한 우주복의 측정이 있었다. 콜린스는 LM과의 만남의 적극적인 참여자였기 때문에, LM이 착륙하지 않거나 너무 일찍 또는 너무 늦게 발사되는 경우를 포함한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한 18가지 만남 계획을 담은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은 117페이지에 달했다.
아폴로 11호의 임무 패치는 콜린스가 만들었다. 예비 사령관인 짐 러벨은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언급했다. 콜린스는 그 아이디어를 좋아했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의 책, ''북아메리카의 물새, 먹이새, 사냥새''에서 예술가 월터 A. 웨버의 그림을 찾아 그렸고, 그 아래에 달 표면과 배경에 지구를 추가했다.[14]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시뮬레이터의 컴퓨터 전문가에게서 나왔다. CSM(사령선)의 호출 부호 ''컬럼비아''는 NASA 공공 업무 담당 부국장 줄리안 쉬어가 만들었다. 그는 대화 중에 콜린스에게 그 아이디어를 언급했고, 콜린스는 더 나은 것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아폴로 11호 훈련 동안 슬레이턴은 콜린스에게 비행 후 승무원 배치를 다시 받을 것을 제안했다. 콜린스는 아폴로 14호의 예비 사령관이 되고, 그 다음에는 아폴로 17호의 사령관이 될 가능성이 컸지만, 그는 아폴로 11호가 성공하면 다시 우주로 가고 싶지 않다고 슬레이턴에게 말했다. 우주비행사의 어려운 일정은 그의 가족 생활을 힘들게 했다. 그는 존 F. 케네디의 10년 안에 달에 착륙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하고 싶었고, 그 목표가 달성되면 달을 더 탐사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 임무는 세르난에게 주어졌다.
약 100만 명의 관중이 발사 현장 근처의 고속도로와 해변에서 아폴로 11호의 발사를 지켜봤다. 발사는 33개국에서 생중계되었으며, 미국에서만 약 2,500만 명의 시청자가 있었다. 수백만 명이 라디오 방송을 청취했다. 거대한 새턴 V 로켓에 의해 추진된 아폴로 11호는 1969년 7월 16일 케네디 우주 센터의 발사 복합체 39A에서 13:32 UTC (09:32 EDT)에 발사되었으며,[15] 12분 후에 지구 궤도에 진입했다. 한 바퀴 반을 돈 후, S-IVB 3단계 엔진이 우주선을 달을 향한 궤도로 밀어냈다. 약 30분 후, 콜린스는 전치, 도킹 및 분리 기동을 수행했다. 이 기동에는 ''컬럼비아''를 사용한 S-IVB 단 분리, 회전, 달 착륙선 ''이글''과의 도킹이 포함되었다. 추출된 후, 결합된 우주선은 달로 향했고, 로켓 단계는 그 너머로 궤도를 따라 날아갔다.
1969년 7월 19일 17:21:50 UTC에 아폴로 11호는 달 뒤편으로 지나가면서 달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 서비스 추진 엔진을 점화했다. 그 후 30번의 궤도에서,[16] 승무원들은 분화구 사빈 D에서 남서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고요의 바다의 착륙 지점을 지나치는 것을 보았다.[17] 1969년 7월 20일 12:52:00 UTC에 올드린과 암스트롱은 ''이글''에 들어가 달 착륙을 위한 최종 준비를 시작했다. 17:44:00에 ''이글''은 ''컬럼비아''에서 분리되었다. ''컬럼비아''에 혼자 탑승한 콜린스는 ''이글''이 표면으로 향하기 전에 손상되지 않았고 착륙 장치가 제대로 배치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 앞에서 회전하는 것을 검사했다.
달 주위를 홀로 비행하는 동안 콜린스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아담 이후 어떤 인간도 그런 고독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 있지만,[18] 콜린스는 임무의 일부라는 것을 매우 실감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모험은 세 명의 남자를 위해 구성되었으며, 나는 나의 세 번째를 다른 두 명만큼이나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썼다. ''컬럼비아''가 달의 뒷면을 지나면서 지구와 무선 통신이 끊겼던 각 궤도의 48분 동안, 그가 보고한 느낌은 두려움이나 외로움이 아니라 "인식, 기대, 만족, 자신감, 거의 환희"였다.
콜린스의 첫 번째 임무 중 하나는 지상에 있는 달 착륙선을 식별하는 것이었다. 콜린스가 어디를 찾아야 할지 알려주기 위해, 미션 컨트롤은 달 착륙선이 목표 지점에서 약 4마일 벗어난 곳에 착륙했다고 믿는다고 무선으로 알려주었다. 그는 의심되는 착륙 지점을 지날 때마다 헛되이 달 착륙선을 찾으려고 했다. 달의 뒷면에서 첫 두 궤도에서 콜린스는 연료 전지에서 생성된 과도한 물을 버리고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돌아올 수 있도록 객실을 준비하는 등 유지 보수 작업을 수행했다. ''컬럼비아''는 달을 30번 공전했다.
세 번째 궤도에서 뒷면에 도달하기 직전에 미션 컨트롤은 콜린스에게 냉각수 온도에 문제가 있다고 알렸다. 너무 차가워지면 ''컬럼비아''의 일부가 얼어붙을 수 있었다. 미션 컨트롤은 그에게 수동 제어를 맡고 환경 제어 시스템 오작동 절차 17을 구현하라고 조언했다. 대신 콜린스는 문제가 있는 시스템의 스위치를 자동에서 수동으로, 다시 자동으로 전환하고 온도를 주시하면서 정상적인 가사 작업을 계속했다. ''컬럼비아''가 다시 달의 앞면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고할 수 있었다. 그 후 몇 궤도 동안 그는 달의 뒷면에서 보낸 시간을 "편안하다"고 묘사했다. 올드린과 암스트롱이 EVA를 완료한 후 콜린스는 만남을 위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잠을 잤다. 비행 계획은 ''이글''이 ''컬럼비아''와 만나도록 되어 있었지만, 콜린스는 ''컬럼비아''를 조종하여 ''이글''을 만나러 내려가는 특정 비상 사태에 대비했다. CSM과 많은 시간을 보낸 후, 그는 그것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느껴, 달에서 돌아온 후 이틀 밤 동안 CM의 하부 장비 베이로 가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우주선 107 – 별칭 아폴로 11 – 별칭 ''컬럼비아''. 최고의 우주선. 신이여 축복하소서. 마이클 콜린스, CMP"[19]
2009년 7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콜린스는 암스트롱과 올드린의 안전에 대해 매우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들이 달에서 사망할 경우, 그가 혼자 지구로 돌아가야 하고, 임무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평생 낙인찍힌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라는 점도 우려했다.[20]
1969년 7월 21일 17:54 UTC에 ''이글''은 달에서 이륙하여 달 궤도에 있는 ''컬럼비아''의 콜린스와 다시 합류했다. ''컬럼비아''와 만난 후, 상승 단계는 달 궤도로 버려졌고, ''컬럼비아''는 지구로 돌아가는 길을 만들었다.[21]
''컬럼비아''는 1969년 7월 24일 16:50 UTC (현지 시간 05:50)에 웨이크 섬 동쪽 2,660km 떨어진 태평양에 착수했다.[22] 총 임무 기간은 8일, 3시간, 18분, 35초였다. 잠수부들은 우주비행사들에게 생물학적 격리복(BIG)을 전달했고, 그들이 구명정에 들어가도록 도왔다. 달 표면에서 병원체를 가져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가능성으로 간주되었다. 우주비행사들은 회수 헬리콥터에 윈치로 끌어올려져 항공모함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21일간의 격리 기간(우주 체류 시간도 계산)의 지구 기반 부분의 첫 부분을 보낸 다음 휴스턴으로 이동했다.
1969년 8월 13일, 세 명의 우주비행사는 뉴욕과 시카고에서 그들을 기리는 퍼레이드에 참여했으며, 약 600만 명이 참석했다.[23][24] 같은 날 저녁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국회의원, 44명의 주지사, 미국 대법원장, 83개국의 대사들이 참석한 공식 국빈 만찬이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서 열렸다.[23][25] 1969년 9월, 우주비행사들은 22개국을 방문하고 세계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포함하는 38일간의 세계 투어를 시작했다.[26][27]
1969년,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를 달 표면에 도달시킨 아폴로 11호에서는 사령선 파일럿을 맡았다. 콜린스는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착륙선으로 달 표면에 하강하는 동안, 달 궤도상에서 아폴로 사령선을 조종하고, 달 표면 사진 촬영 등을 수행했다. 따라서 콜린스 본인은 달 표면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잊혀진 우주 비행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94]。
5. NASA 이후 활동
5. 1. 국무부 공공 담당 차관보
토머스 O. 페인 미국 항공우주국(NASA) 국장은 윌리엄 P. 로저스 국무장관이 콜린스를 공공 담당 차관보 자리에 임명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1969년 11월, 승무원들이 미국으로 돌아온 후, 콜린스는 로저스와 면담을 갖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권유로 이 직책을 수락했다. 그는 언론인도 전문 외교관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전임자들과 달리 국무부 대변인 역할을 하지 않고, 국무부 공공 업무국의 수장으로서 일반 대중과의 관계를 관리했다. 115명의 직원과 250만 달러의 예산을 사용했지만, 이는 미국 국방부의 6,000명의 공공 업무 직원과 비교하면 작은 규모였다.콜린스는 1969년 12월 15일에 이 직책에 임명되었고 1970년 1월 6일에 업무를 시작했다.[28] 베트남 전쟁이 좋지 않게 진행되고, 캄보디아 침공과 켄트 주립 대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 전국적인 항의와 불안을 촉발한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아폴로 11호의 명성을 이용하여 대중과 소통하려 했으며, 국가 문제의 일부를 폐쇄성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1970년 버몬트주 세인트 마이클스 칼리지 졸업 연설에서 "농부는 농부에게, 학생은 학생에게, 기업 지도자는 다른 기업 지도자에게 말하지만, 이러한 내부적인 대화는 주로 자신의 신념을 반영하고, 기존의 편견을 강화하며, 반대 의견을 배제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했다.
콜린스는 이 직업을 즐기지 못해, 닉슨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 국립 항공우주 박물관 관장이 되었다.[29] 그의 퇴임은 1971년 2월 22일에 공식 발표되었고, 공공 담당 차관보로서의 임기는 1971년 4월 11일에 종료되었다.[30] 이 자리는 캐럴 레이스가 1973년 10월에 그를 계승할 때까지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31][32]
5. 2. 국립 항공우주 박물관 관장
1946년 미국 의회는 스미소니언 협회가 관리하고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에 위치하는 국립 항공 박물관 인가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예산 법안 통과 실패로 박물관 건설 자금은 없었다. 1957년 스푸트니크 쇼크와 우주 경쟁으로 우주 탐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급증했고, ''프리덤 7''과 ''프렌드십 7'' 머큐리 계획 우주선이 스미소니언에 기증되어 많은 방문객을 불러 모았다. 1966년 국립 항공우주 박물관으로 개칭되었지만, 여전히 건물 건설 자금은 부족했다. 아폴로 11호는 우주에 대한 관심을 다시 한번 급증시켰고, 달 암석 전시회는 한 달 만에 20만 명의 방문객을 유치했다. 1970년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의 노력으로 박물관 건물 건설 자금 지원을 위한 상원 연설이 이루어졌다.마이클 콜린스는 의회 자금 확보 및 박물관 건설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국립 항공우주 박물관 관장 직무를 수행했다. 콜린스는 로비를 통해 1972년 의회로부터 건설 자금 1,300만 달러와 계약 권한 2,700만 달러를 승인받았다.[33] 하지만 예산은 콜린스가 희망했던 것보다 적었고,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1976년 7월 4일 개관 예정이었기에 시간적 압박도 심했다.[34]
헬무스 오바타 & 카사바움의 건축가 교 오바타가 설계한 박물관은 내셔널 몰의 다른 박물관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고, 외관은 테네시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35] 길베인 건설 회사가 건설 계약을 체결했으며, 설계의 각 구성 요소가 완성되는 대로 계약이 체결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36] 1972년 11월 20일 새 박물관의 기공식이 열렸다.[37] 콜린스는 건설 감독 외에도 박물관 직원 채용, 전시회 감독, 지구 및 행성 연구 센터 설립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38]

박물관은 예산 내에서 완공되었고, 1976년 7월 1일 예정보다 3일 일찍 개관했다.[39][40]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개관식을 주관했으며,[35] 첫 달에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아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박물관 중 하나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방문객들은 비행의 이정표 홀에서 ''라이트 플라이어'', ''세인트루이스의 정신'', ''글래머러스 글레니스''와 함께 ''컬럼비아''를 볼 수 있었다.
콜린스는 1978년까지 관장직을 맡았고,[41] 이후 스미소니언 협회 차관으로 물러났다.[42]
5. 3. 기타 활동
콜린스는 1974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고급 경영 프로그램을 수료했으며, 1980년 LTV 항공우주의 부사장으로 버지니아주 알링턴 카운티에서 일했다.[44] 1985년 사임하고 자신의 컨설팅 회사인 마이클 콜린스 어소시에이츠를 설립했다.[66] 1974년에 자서전 ''불을 지피며: 우주비행사의 여정''(Carrying the Fire: An Astronaut's Journeys)을 집필했다. ''뉴욕 타임스''의 작가 존 노블 윌포드는 이 책을 "우주비행사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최고의 설명으로 여겨진다"고 평했다.[45]그는 미국의 우주 프로그램 역사를 다룬 ''리프토프: 미국의 우주 모험 이야기''(Liftoff: The Story of America's Adventure in Space, 1988), 화성에 대한 유인 우주비행에 관한 논픽션 책인 ''화성으로의 임무''(Mission to Mars, 1990), 그리고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어린이 책인 ''달로 날아가기 외 이상한 곳들''(Flying to the Moon and Other Strange Places, 1976)을 썼으며, 이 책은 개정되어 ''달로 날아가기: 우주비행사의 이야기''(Flying to the Moon: An Astronaut's Story, 1994)로 재출간되었다. 글쓰기와 함께 주로 플로리다 에버글레이즈나 그가 조종했던 항공기를 수채화로 그렸으며, 우주와 관련된 그림은 드물었다.[46] 그는 처음에 그림에 서명을 하지 않았는데, 서명이 있으면 가격이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47]
콜린스는 아내 팻과 함께 2014년 4월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플로리다주 마르코 아일랜드와 노스캐롤라이나주 에이번에서 살았다.[48]

6. 사망
콜린스는 2021년 4월 28일 암으로 인해 플로리다주 네이플스 자택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9][50] 아폴로 11호의 마지막 생존자인 버즈 올드린은 "콜린스가 어디에 있든 앞으로 있을 곳이든, 그는 항상 우리를 새로운 높이와 미래로 재빠르게 이끌 불꽃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51]
콜린스의 유해는 2023년 1월 30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52]
7. 수상 및 영예
마이클 콜린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 이사를 역임했으며 명예 이사로 활동했다.[45] 실험 테스트 파일럿 협회 및 미국 항공우주학회의 회원이었다.[53][54]
콜린스는 국제 항공우주 명예의 전당(1971),[55] 국제 우주 명예의 전당(1977),[56] 미국 우주 비행사 명예의 전당(1993),[57][58] 국립 항공 명예의 전당(1985) 등 4개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8년에는 캘리포니아주 랭커스터의 항공우주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었다.[59] 국제 천문 연맹은 소행성 6471 콜린스의 이름을 그를 기려 명명했으며,[60] 달의 크레이터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61]
1966년 제미니 프로젝트에서의 공로로 공군 수훈 비행 십자 훈장을 받았다.[62] 공군 사령관 조종사 우주 비행사 윙도 수여받았다.[53] 1966년 제미니 10호 임무에서의 역할을 기려 NASA 특별 공로 훈장을, 아폴로 프로젝트에서 공군 공로 훈장과 NASA 공로 훈장을 수여받았다.[65] 1977년 공로 훈장을 수여받았다.[66]
1969년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고,[23][67] 1969년 콜리어 트로피와 제너럴 토마스 D. 화이트 USAF 우주 트로피를 수여받았다.[68] 국립 항공 협회 회장은 콜린스와 올드린에게 트로피 복제품을 수여했다.[69][70] 1970년 국제 하먼 트로피를 받았으며,[71][72] 1971년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수여했다.[73] 애그뉴는 또한 1970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의 허바드 메달을 수여하며 "여러분은 미국 역사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리를 얻었습니다"라고 말했다.[74]
1970년 실험 테스트 파일럿 협회(SETP)로부터 아이번 C. 킨첼로 상을 받았다.[75][76] 1989년에는 그의 개인 서류 일부가 버지니아 공과대학교로 이관되었다.[66] 1999년 달 착륙 30주년을 기념하여 앨 고어 부통령은 아폴로 11호 승무원에게 항공 분야의 스미소니언 랭글리 금메달을 수여했다. 행사 후 승무원들은 백악관으로 가서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달의 돌을 넣은 케이스를 증정했다.[77][78]
2011년 국회의사당 원형 홀에서 뉴 프론티어 의회 금메달을 수여받았다. 행사에서 NASA 국장 찰스 볼든은 "우주 비행의 영광을 누린 우리들은 그들이 개척한 길을 따랐다"고 말했다.[42][79]
8. 대중문화
콜린스는 2007년 다큐멘터리 영화 ''인 더 섀도우 오브 더 문''에 출연했고,[80] 2009년 영화 ''유스 인 리볼트''에서 "늙은이" 역을 맡았다.[81] 1996년 TV 영화 ''아폴로 11''에서는 짐 메츨러가,[82] 1998년 HBO 미니시리즈 ''프롬 디 어스 투 더 문''에서는 캐리 엘위스가,[83] 2009년 TV 영화 ''문 샷''에서는 앤드류 링컨이, 2018년 영화 ''퍼스트 맨''에서는 루카스 하스가,[84] 2019년 다큐멘터리 영화 ''아폴로 11''에서 본인이 직접 콜린스 역을 맡았다. 텔레비전 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아폴로 11호 우주 비행사들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둥근 명판으로 헌정되었다.[85] ''포 올 맨카인드''에서는 라이언 케네디가,[86] ''더 크라운''에서는 앤드류-리 포츠가,[87] 2024년 영화 ''플라이 미 투 더 문''에서는 크리스찬 주버가 콜린스를 연기했다.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제스로 툴은 1970년 앨범 ''베네핏''에 "마이클 콜린스, 제프리 앤 미"라는 곡을 녹음했는데, 이 곡은 보컬리스트 이언 앤더슨 (및 친구 제프리 해먼드)의 부적응 감정을 달 표면을 걷는 특권을 누린 사람들에게 남겨진 우주 비행사의 감정과 비교한다.[88] 2013년, 인디 팝 그룹 더 보이 리스트 라클리 투는 앨범 ''더 그레이트 퍼햅스''에 "마이클 콜린스"라는 곡을 발표했다. 이 곡은 현대 사회의 관점 부족과 대조되는 다른 모든 인간과의 진정한 분리라는 유형의 고독을 누릴 수 있었다는 콜린스의 감정을 사용한다.[89][90] 미국 포크 아티스트 존 크레이기는 2017년 앨범 ''노 레인, 노 로즈''에 "마이클 콜린스"라는 곡을 녹음했다. 이 곡은 아폴로 11호 임무의 필수적인 역할을 받아들이며, 후렴구에서는 "때로는 명성을 얻고, 때로는 무대 뒤에 앉아 있지만, 내가 없었다면 그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노래한다.[91]
콜린스는 1969년 아폴로 11호 달 착륙 50주년을 기념하는 구글 두들에 내레이션을 제공했다.[92]
9. 작품 목록
마이클 콜린스는 우주비행사로서의 경험과 우주 탐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1974년에는 자신의 우주 비행 경험을 생생하게 담은 ''캐링 더 파이어: 우주비행사의 여정''(Carrying the Fire: An Astronaut's Journeys)을 출간했다. 1976년에는 ''달로의 비행과 또 다른 이상한 장소들''(Flying to the Moon and Other Strange Places)을 출간했다. 1988년에는 미국의 우주 탐험 이야기를 다룬 ''리프트오프: 미국의 우주 모험 이야기''(Liftoff: The Story of America's Adventure in Space)를 출간했다. 1990년에는 화성 탐사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제시한 ''미션 투 마스''(Mission to Mars)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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